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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기고글

남성이 여성차별로 “막대한 득”을 본다는 박노자 교수의 의견에 대해

http://wspaper.org/article/17474

양효영 (노동자연대 학생 회원)

 

며칠 전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한국학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노동자 연대> 이현주 기자의 기사 ‘남성은 여성차별로 득을 보는가?’(이하 ‘득을 보는가’)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의 “짤막한 논평을 올렸다.

박노자 교수는 남성들이 여성차별로 “막대한 득을 본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마트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임금과 남성 관리자들의 임금 격차 등의 사례를 든다. 둘 다 착취 받지만 남성은 여성에 대한 “과도착취”로 얻어지는 “잉여 덕에” 덜 착취받을 수 있다는 게 박노자 교수의 핵심 주장이다. 또한 이것이 자본의 분열통치 전략일 수 있지만 남성들에게 아주 잘 먹히는 전략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박노자 교수는 여성차별은 자본주의보다 오래됐다고 주장한다. 또한 여성 차별의 혐의로부터 진보·혁명 조직들도 자유롭지 못하고, 공산주의가 돼도 남성들은 여성 활동가의 투쟁 대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성이 여성차별로 득을 보지 않는다’는 주장을 여성 차별을 “부차적 문제”로 보려는 “상식 이하의 시각”이라고 치부한다.

우선 오해부터 바로잡자면, 박노자 교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여성차별은 자본주의보다 좀 오래됐습니다”라며 마치 ‘득을 보는가’에서 이현주 기자가 여성차별의 기원을 자본주의라고 주장한 것처럼 말했지만, 그 기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성차별은 잉여 생산물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계급이 생겨나면서 함께 등장했다.”

노동자연대는 박노자 교수가 말한 것처럼 여성차별이 “계급사회 초기”부터 시작됐다고 본다. 바로 그게 엥겔스가 일찍이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주장했던 바다. 계급사회 이래로 존속해 온 여성차별이 오늘날에도 유지되는 이유는 오늘날의 계급사회인 자본주의의 필요 – 착취와 축적 – 때문이라는 게 ‘득을 보는가’ 기사의 핵심적 주장이었다.

박노자 교수가 <노동자 연대>의 주장을 엉뚱하게 오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가령 <노동자 연대> 168호의 ‘박노자 교수의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함’ 기사를 보라.) 박노자 교수가 <노동자 연대>의 주장을 왜 곡해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또 다른 오해도 바로잡아야 할 것 같다. 박노자 교수는 마치 이현주 기자가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을 부정한 듯이 말하지만, 이는 심각한 오해이다. 모든 남성이 여성차별에서 이득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해서 그것이 곧 여성차별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차별이 심하면 심할수록 노동계급은 분열돼 계급해방에서 멀어진다. 여성 노동자들이 임금과 노동조건에서 차별받을 때, 처지가 상대적으로 더 나은 남성 노동자들은 조건의 하향 압력을 받는다. 차별로 일부 개인과 부문의 남성 노동자들이 약간의 이득을 볼 수는 있어도 이것은 차별을 지속시켜 계급 전체로는 오히려 손해다. 따라서 차별에 맞서 싸우는 게 여성뿐 아니라 남성 노동자의 계급이익에 부합한다는 게 ‘득을 보는가’ 기사의 핵심 요지였다. 그런데 차별에 맞서 남녀 노동계급이 함께 싸우자는 주장이 어떻게 여성차별을 “부차적 문제”로 보는 “상식 이하의 시각”이 되는 것인가?

계급 격차

박노자 교수는 자신을 포함해서 남성들은 여성차별로 “막대한 득”을 본다며, “대부분이 여성인 마트 비정규직 임금이 1백만 원을 넘지 못하는데, 대부분이 남성인 관리자들의 임금이 그것보다 2~3배가 된다”는 것을 한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먼저, 중간계급이라고 볼 수 있는 관리자와 노동계급 여성의 처지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다. 박노자 교수가 의미하는 관리자가 ‘상층 관리자’라면 여기엔 계급 격차가 더 크게 작동한다. 그리고 이때에는 다수 노동계급 남성들도 ‘상급 관리자’와 비교해 처지가 더 나쁘고, 이들과 빈번하게 충돌한다.

만약 박노자 교수가 말한 ‘관리자’가 남성 정규직 노동자를 지칭했다 쳐도, 남성 노동자가 여성 노동자의 저임금으로 득을 본다고 할 수는 없다. 박노자 교수는 더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과도착취”로부터 더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초착취를 면할 수 있다” 하고 주장한다. 박노자 교수는 마치 임금을 더 많이 받으면 덜 착취당하고 임금을 적게 받으면 더 착취당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착취율은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 중에 기업주가 가져가는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로 결정된다. 따라서 임금 수준이 높아도 착취율이 그만큼 높을 수 있다.

게다가 자본가가 여성은 초과착취하고 남성은 덜 착취하려 한다는 박노자 교수의 가정도 별 근거가 없다. 자본가들은 되도록 두 집단 모두를 더 착취해서 이윤 전체를 더 늘리고 싶어하지 않을까? 자본가라면 여성의 낮은 임금을 유지시킴으로써 남성의 임금도 더 떨어뜨리고 싶어할 것이다. 그래서 일반으로 말해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열악해진다고 다른 한 쪽이 나아지는 관계가 아니다. 한쪽의 조건이 나아지면 함께 나아지고, 나빠지면 함께 나빠진다. 만약 차별을 해도 결국 자본가가 지출해야 할 임금 몫도 같다면 굳이 차별을 유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좀더 나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가 차별로 득을 본다는 이런 관점은 이 사회에서 누가 진정한 득을 보는지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남성 노동자가 여성 노동자보다 임금을 약간 더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기업주들은 그보다 수백 배의 이윤을 챙겨간다. 이렇게 남녀 노동자 모두를 착취해 이윤을 얻는 자들 중에는 여성도 포함돼 있다. 박근혜, 최연혜, 김을동, 조현아, 이부진 등 지배계급 여성들보다 처지가 나은 남성 노동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다른 조건, 부문에 있는 노동자들이 정부와 기업주에 맞서 함께 저들의 몫을 빼앗아 오자고 주장해야 한다. 이를 통한 상향평준화를 요구해야 한다.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가사와 육아를 사회화하는 데 이윤의 일부를 사용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계급 내에 더 나은 처지에 있는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차별로 득을 본다면서 우리 내부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진정한 해결책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사실 정부와 기업주들은 우리의 주의를 계급 관계라는 핵심적 문제에서 딴 곳으로 돌리게끔 하려고 이런 관점을 퍼뜨리고 싶어한다. 박노자 교수도 “자본의 분리 통치 전략”을 우려하는 듯한데, 남성 노동자들도 체제의 ‘종범’으로 여기는 관점이 이런 분리 통치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일부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을 차별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계급이익을 반영한 행동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성 노동자들의 이런 행동은 여성 차별을 방치해 결국 자신들도 더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만든다. 이현주 기자도 지적했듯이,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객관적 계급이익 대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모두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 어떤 정치 단체도, 마르크스주의자들도(박노자 교수 같은 좌파 지식인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계급적 단결을 위한 의식적 개입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남성 이득론’은 여성차별로 자신이 득을 본다고 착각하는 남성들에게 도전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보수적 생각에 확신을 줄 수 있다. 그것이 당신들의 이득에 부합하는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런 주장은 차별에 맞서 계급 전체의 힘 전체를 사용하도록 하는 과제 달성을 오히려 방해한다.

단결의 잠재력

박노자 교수는 현실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이런저런 상황을 묘사하고는 여기에서 곧장 남성이 여성차별로 득을 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상만이 아니라 그 이면의 동역학을 함께 봐야 한다. 개별 사람들 간의 관계만 볼 게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그것과 개별 · 부문의 관계들을 살펴봐야 한다.

자본가들은 개별 가족에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떠넘긴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가족에 매이게 되고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차별받게 된다. 남성은 집안에서 ‘가장’ 대우를 받을진 몰라도 생계부양자로서 혹사를 감내해야 하고, 여성은 가사 · 양육과 노동시장에서의 착취와 차별이라는 이중의 굴레에 고통받는다. 이렇게 보면, 노동계급의 두 성 모두가 겪는 고통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는 것은 노동계급 그 누구도 아니고 남녀 지배계급이다.

현상론과 달리 마르크스주의는 현상 이면의 진실을 보며, 현실의 변화 가능성을 포착한다. 이게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과 남성 노동계급의 이익이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이 단결할 때만 임금 인상, 무상보육, 유급 출산 · 육아 휴직 등 유의미한 개혁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본다. 비록 지금 그 단결이 충분치 않을지라도, 마르크스주의자와 좌파 등 단결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의식적 개입으로 잠재력을 현실화시키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본다.

반대로 박노자 교수는 이런 변화와 해방의 가능성에 아주 회의적인 것 같다. 가령 ‘남성이득론’을 주장하면서 혁명조직들도 여성 차별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조선공산당의 여성 활동가들의 ‘지위’의 “주된 원천”이 남성 지도자들과의 애정 관계에 있었음을 제시했다. 조선공산당 사례가 진실인지는 논외로 두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선진적 남성들조차 여성해방에 진지하지 않고, 선진적 여성도 종속적 처지를 감내한다면, 여성해방은 대체 누가 수행할 수 있으며 어떻게 가능한 걸까?

‘남성 이득론’은 여성과 남성 노동자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잘 설명할 수 없고, 여성과 남성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고 함께 차별에 맞서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성차별을 진정으로 끝장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의 단결의 잠재력을 더 고무하고 현실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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