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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기고글

슬라보예 지젝의 유럽 난민 사태에 대한 입장을 보며 – 유럽 민중의 국경 개방 요구를 지지해야 한다

김지은

[<노동자 연대> 온라인 기사 링크 : http://wspaper.org/article/16383 ]

지난 9월 14일 <한겨레>는 유럽 난민 사태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의 입장을 기사로 실었다. 슬라보예 지젝은 전체주의와 인종차별에 반대한 운동가이자 철학자이다. 나는 지젝의 지적 중에 일리있는 측면에 많음에도 그의 주장이 실천적으로 유럽 지배자들의 국경 통제 정책과 우파적 편견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음을 비판하려 한다. 다만 <한겨레>가 전문을 싣기보다 일부를 발췌해 싣다보니 그의 글에 담긴 장점과 약점이 충분히 드러나지는 않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겠다.

지젝은 난민 사태의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며 “우리 삶의 공동체적인 방식에 진정한 위협은 외국인 난민들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의 작동”이라고 말했다. 그는 난민 사태를 해결하려면 “난민들을 창출하는 조건들을 일소할 급진적인 경제적 변화가 필요하다. 내가 젊었을 때, 그런 조직화된 규제 시도는 공산주의라 불렸다. 아마 우리는 그것을 재발명해야 할 것이다. 아마 장기적으로는 이것이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하고 글을 맺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동안 지젝이 취해 온 것처럼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구체적 대안들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주장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국경을 개방하자는 의견이 위선적인가?

지젝은 난민 사태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반응을 두 가지로 압축한다. 하나는 “어떻게 유럽이 지중해에 수천 명이 수장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있느냐”며 국경을 활짝 열고 연대하자는 이들과 다른 하나는 난민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고 “우리 생활 방식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즉,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이들이다. 지젝은 옛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말을 인용하며 “둘 모두 더 나쁜 것”이라고 비판한다.

지젝은 국경을 개방하자는 의견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좌파’들이 “위선적”이라고 비판했다. ‘자유주의 좌파’들은 자신들이 국경을 개방하자는 목소리를 내더라도 반이민주의 포퓰리스트(극우주의자)들의 저항 때문에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뿐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좌파 자유주의자들이나 이를 모두 알고도 “고귀한 영혼을 뽐내며” 실제로는 반이민주의자들과 적대적 공생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첫째, 국경 개방 요구를 단지 유럽 지배계급 내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적 언사로만 여기는 것은 큰 착각이다.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국 정부에 난민 수용을 요구하는 난민 연대 시위에 참가했다. 9월 12일 하루만 보더라도 영국 런던에서 5만여 명, 맨체스터에서 2만 명, 브리스톨에서 3천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덴마크 코펜하겐 3만 명, 독일 함부르크 1만 4천 명, 오스트리아 빈 5천 명, 프랑스 파리 3천 명, 그 밖에도 아일랜드, 스웨덴, 헝가리, 그리스, 스페인, 스위스에서도 난민 연대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말로만 난민 수용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난민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들을 환영하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이런 대중적 항의 때문에 일부 정치인들이 자유주의적 언사라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물며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국제적 단결을 지지해온 일부 좌파들까지 자유주의자들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사실 그 자신이 무슬림 난민의 유럽 이주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인 듯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자 유럽의 지배자들도 난민 문제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지젝의 주장의 둘째 문제점이 드러나는데, 그는 국경 개방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드러나듯 국경 개방의 여부는 난민 환영 시위가 정부를 실질적으로 압박하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느냐에 달려있지, 실패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난민 사태는 유럽인 모두의 잘못인가?

지젝은 난민 사태의 근본 원인이 글로벌 자본주의에 있다면서 ‘콩고민주공화국 분쟁’을 사례로 들었다. 그는 콩고 민중이 겪은 고통의 뿌리가 “광물 자원의 무역과 통제권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열강들의 개입 때문이었다며 “민족 간의 분쟁이라는 외관 속에 글로벌 자본주의의 작동을 식별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서방이 이라크·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시리아와 이라크에 미사일을 퍼붓고, 시리아 정권이 자국민을 학살하는 것에 눈감고 있는 것 등이 난민 사태의 진정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분석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포함해 많은 좌파가 공유하는 것으로 옳은 지적이다.

그런데 첫째, 지젝은 ‘우리의 잘못’이라는 표현으로 난민 사태의 원인 제공자가 누군지를 흐린다. 제국주의 침략으로 이득을 본 것은 자본가들과 지배계급이다. 각국의 노동자들은 이득을 보기는커녕 오히려 전쟁터로 끌려가고,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착취당하며 삶의 조건을 공격받아왔다.

둘째, 미국의 위선을 폭로하는 것은 좋지만 이런 비판이 ‘따라서 미국은 시리아에 개입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지젝이 이런 입장을 밝힌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비개입’을 강하게 비판하다 보면 그런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실제 국제 좌파 중 일부가 이런 입장을 취했는데 어떠한 이유로든 미국의 개입은 사태를 개선시킨 적이 없다. 동유럽과 발칸 반도, 중동과 남아메리카, 동아시아와 한반도 모두에서 미국의 개입은 비극을 낳고 불안정만 심화시켰다. 미국 정부 자신이 문제 원인인 제국주의 위계 체계의 꼭대기에서 현 질서를 수호하는 구실을 하는 데다가, 언제나 분쟁 지역의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 정부 자신과 자본가들을 위해 개입하기 때문이다.

셋째, 지젝은 ‘경제적 식민주의’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부정확한 표현이다. 미국이 IS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시리아 정권의 자국민 학살에 눈감고 있는 것을 보면 미국의 지배계급과 시리아의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식민주의라는 표현은 이와 달리 강대국이 약소국 국민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렇게 되면 약소국 내의 계급 문제를 가리는 효과를 낸다. 식민주의라는 규정은 중동 노동자들과 민중이 자국 지배자들에 맞서 싸우기보다, 서방 제국주의에 맞서 동맹을 맺도록 이끄는 구실을 하기 쉽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가와 노동계급이라는 근본적인 분절선이 있고 유럽 난민 사태의 책임은 각국의 자본가들과 지배계급에게 있다. 따라서 유럽 난민들과 유럽의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는 대립하지 않는다.

급진적 언사로 치장한 기회주의

지젝은 좌파가 “(중동이나 아프리카 난민들의 유입에 대비해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생활방식을 지키려 하는 것이 파시스트나 인종주의 카테고리에 있다는 개념을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유럽에 반이민주의자들이 번성하는 길을 열어주게 될 것”이라며 “삶의 세부적인 방식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우려에 좌파들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하고 말했다.

이주민들이 유럽적 생활방식에 따르지 않고 유럽적 가치를 파괴한다는 우파적 편견에 타협하라는 것이다. 그는 좌파가 이런 편견에 일관되게 반대하면 오히려 그런 ‘우려’를 하는 사람들을 내치는 효과를 냄으로써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설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무슬림 혐오를 합리화하기 위한 터무니없는 궤변이다. 전쟁에 일관되게 반대하면 전쟁광들에게 설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인가!

지젝은 실천적 결론으로서 유럽 정부들이 난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모든 조처’(국경 개방은 제외하고)를 하되, 난민들은 유럽 지배자들이 “정한 주거지역 내에서” 살며 “그 지역의 법과 사회적 규범을 따르”라고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이주민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적 관습을 포기할 모든 개인의 개별적 자유를 존중”하라며 무슬림 혐오를 드러낸다.

지젝은 유럽 안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이주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폭로하며 자본주의 유럽의 위선을 폭로하고서는, 유럽 내에서도 노르웨이, 영국, 독일 등 더 나은 지역으로 가려 하는 난민들에게 “당신들이 꿈꾸는 노르웨이는 없다” 하고 쏘아 붙인다. 난민들이 “꿈꾸는” 삶이라는게 결국 그토록 비참한 이주 노동자들의 처지임을 강조하며 이들의 이주를 지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냉소적 태도를 취한다. 심지어 사우디 아라비아처럼 난민 문제에 서방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책임져야 하는 중동 부자 나라들의 난민 통제 정책을 비난하고서는, 은근히 같은 “무슬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중동 난민들이 유럽적 생활 방식을 파괴할까 봐 걱정하는 지젝의 입장을 고려하면 이는 유럽이 아니라 중동에서 살라는 뉘앙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지젝의 급진적 체제 비판은 실천적 과제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지배자들의 규칙과 편견을 강화하는 결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유럽 난민사태의 진정한 대안은 무엇인가?

유럽 난민 사태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제국주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지젝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이 일들을 자행한 사람들은 평범한 유럽인들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자본가들과 지배계급이다. 각국의 노동자 계급과 난민, 이주노동자들을 포함한 피억압계급은 자본가들과 지배계급에 맞서 저항해야 하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단결시키려면 일체의 국경 통제에 반대하고 이주의 자유를 일관되게 옹호해야 한다. 지젝이 “돈은 마음대로 국경을 오가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는” 체제의 모순을 비판했다면 그 결론은 이주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디 간들 똑같으니 남들에게 피해주지 말고 그냥 살아라’ 하는 식의 냉소는 유럽과 중동의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효과만 낼 것이다.

또, 9월 12일에 벌어진 난민 연대 시위와 같은 거리의 행동이 이윤만을 쫓는 자본가들과 지배계급에게 실질적으로 압력을 가하려면 자본주의 체제의 이윤을 창출하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만나야 한다. 이점에서 유럽의 노동자들이 난민 연대 시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무척 희망적인 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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